Minnesota Twins

::칼럼:: 경기 내에서 거인이자 신사였던 Killebrew

NLF 2011. 5. 18. 00:21

::칼럼:: 경기 내에서 거인이자 신사였던 Killebrew
홀 오브 페이머의 클래스, 친절함은 위대한 선수들 사이에서도 그를 빛나게 만들었다
By Hal Bodley | MLB.com Columnist | 05/16/11 10:00 AM ET

  작별인사를 어떻게 해야할까?

  한번 생각해보자.

  당신은 암으로 죽어가고 있고, 빛이 흐릿해지면서 작별인사를 해야하는 운명 앞에 놓이게 되었다.

  만약 Harmon Killebrew라면, 겸손하고 예의있게 공손한 태도로 진심을 담아 이별을 말할 것이다.

  지난 주에 이 홀 오브 페이머가 '지독한 질병을 이겨내기 위해 최선을 다했습니다,'라고 말했을 때,  나는 곧바로 '역시 Killebrew답구나'라는 생각을 했다. 그 순간에 그렇게 마음 속에서 우러난 진심을 말할 수 있는 사람은 많지 않을 것이다.

  작별인사를 어떻게 해야할까?

  Killebrew에게 그것은 한가운데로 들어오는 패스트볼처럼 정직한 순간이었다: "제 병은 주치의의 예상보다 빨리 진행되었습니다 ... 다음 단계로 넘어간다니 저는 정말 편안합니다 ... 제 옆에 있는 [아내] Nita와 함께 안락하고 평안하게 제 마지막 날들을 보내고 싶습니다."

  74살의 Harmon은 호스피스 케어를 받으면서 식도암이 진행되도록 그대로 둘 것이다.

  통산 573개의 홈런으로 올타임 11위에 올라있는 그는 내가 만난 선수들 중에 가장 존경받고 사랑받는 선수 중 한 명이었다.

  그렇다, 그는 미네소타 트윈스 팬들의 입에 아직도 회자되는 초대형 홈런을 쳤던 무서운 슬러거였지만, 세심한 신사이자 배려심 깊은 사람으로서 필드 바깥에서 보여준 행적이 좀 더 의미있는 것이라고 확신한다.

  지난 주에 그가 '송별 멘트'를 해야한다고 생각했던 이유가 바로 그것 때문이다.

  "그는 좋은 야구선수였음은 물론이고, 아마도 인격적으로 더 훌륭한 사람일 것입니다," 한 때 트윈스에서 함께 뛰었던 필리스의 Charlie Manuel 감독이 말했다.

  Killebrew는 매년 명예의 전당 헌정식 주말에 쿠퍼스 타운에 방문했다. 그는 그의 온화함과 고운 심성을 보여줌으로써 그날의 의미를 더해주었는데, 그것이 정말로 그리워질 것이다.

  그는 아이다호주(州)에서 청소년기를 보낼 당시의 자신과 형의 이야기를 하는 것을 좋아했다.

  "제 아버지께선 저와 형을 데리고 마당에서 놀아주곤 하셨습니다," 그는 이렇게 말했었다. "어머니는 밖으로 나오셔서 '잔디 다 망가진다'라고 하셨죠. 그럼 아버지는 '우리는 잔디를 키우는게 아니라 아이들을 키우는 거야.'라고 답하셨습니다."

  그리고, 미래의 홀 오브 페이머도 키우셨다.

  몇년 전에 나는 Jim Thome가 상당히 오랜 시간동안 팬들에게 사인을 해주며 대화하는 것을 보았다. 그는 그에게 다가온 모든 사람들에게 친절함을 보였다.

  나중에 클럽하우스에서 만난 Thome에게 '당신이 팬들과 소통하는 모습을 보니 Harmon Killebrew에 대한 생각이 나는군요.'라고 말했다.

  Thome는 웃으며 말했다: "그와 저를 비교하시다니, 너무 과찬이십니다."

  1954년에 Killebrew가 팀에 왔을 당시 워싱턴 세네터스의 해설자였던 Bob Wolff는 그에게 'Killer'라는 닉네임을 붙여주었다.

  그가 파워풀한 스윙으로 야구계를 뒤흔들자, 그 닉네임은 적절한 작명이 되었다. 그는 40+홈런시즌을 8차례 기록했고, 비거리 520피트의 대형 홈런을 쳤었으며 1969년 아메리칸 리그 MVP였다.

  "나쁜 의도는 없었습니다," 예전에 그가 이런 말을 했었다. "하지만 제게 파워가 있는 것 같습니다."

  필드 바깥에서 그 닉네임은 부적절했다. Killebrew는 얌전하고 친절한 신사였다.

  "그는 진정한 트윈스 프랜차이즈의 얼굴입니다," Killebrew와 15시즌을 함께 했던 옛 트윈스 투수 Jim Kaat가 말했다. "트윈스가 신사적인 구단이라는 명성을 얻은 것은 그가 있었기 때문이라고 생각합니다. 그런 명성은 그로부터 시작된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1969년에 트윈스 루키였던 Manuel 감독의 라커는 Killebrew와 Killebrew의 절친이었던 고(故) Bob Allison의 사이에 있었다.

  "그 당시 저는 제게 일어났던 일들 중 가장 좋은 일이라고 생각했습니다," 트윈스에서 네 시즌을 뛰었던 Manuel 감독이 말했다. "그와 Allison은 저를 많이 도와주었습니다. 그들과 함께 저녁을 먹으러 가서 오랫동안 야구에 대한 얘기를 했었습니다."

  "'Killer'는 농담을 좋아했고 자주 웃었는데, 하지만 정말로 조용한 사람이었습니다. 타격에 관해서 그는 저에게 큰 도움이 되었습니다. 그는 주전이었고, 저는 벤치에 앉아서 많은 시간을 보냈었습니다. 제가 벤치에서 경기를 보고만 있었기 때문에 그의 타격에 대해 저와 얘기하곤 했습니다."

  Manuel 감독은 Killebrew가 '가장 중요한 것은 선구안이다. 그는 볼넷으로 나가는 것을 좋아하지 않았지만, 치기 좋은 볼을 얻기 위해 볼을 잘 봐야 한다고 가르쳐주었다'라고 말했다.

  Manuel 감독은 Killebrew의 커리어가 끝나갈 무렵에는 그가 바깥쪽 코너의 볼을 너무 많이 보기만 했었다고 말했다.

  "'Killer'는 '그게 스트라이크야?'라고 제게 물었습니다," Manuel 감독이 당시를 회상했다. "우리는 당시에 8-트랙 비디오를 사용했었습니다. 그것을 항상 보면서 그의 타격에 대해 공부했습니다. 저는 그에게 그 공들은 스트라이크가 맞다고 말해야 했고, 그는 자신이 당겨치는 스타일이기 때문에 그런 것이라고 저에게 말했습니다."

  "그는 짧고 간결한 스윙을 했는데, 대단한 폭발력이 있었습니다. 그는 다부진 체격이었습니다. 그는 발이 느렸고, 그것이 그의 통산 타율[.256]이 높지 않은 이유 중 하나입니다. 발이 빨랐다면 3할을 쳤을 수도 있습니다. 요즘 Ryan Howard에게 우측 외야로 수비시프트를 하는 것처럼 당시에도 그에게 좌측 외야로 시프트가 있었습니다. 그와 Frank Howard는 그 당시 그 누구보다 어려운 상황에서도 좋은 타격을 했습니다."

  스테로이드의 도움을 받았을지도 모를 근래의 많은 홈런들을 고려해보면, Killebrew의 기록들이 좀 더 인상깊게 느껴진다. 통산 573개의 홈런이 그를 쿠퍼스타운으로 이끈 것은 분명하지만, 그의 겸손하고 다정한 품행이야말로 그를 진정한 홀 오브 페이머로 만들었다.

▒ 원문주소: http://minnesota.twins.mlb.com/news/article.jsp?ymd=20110516&content_id=19131490
(이 게시물은 위 링크의 기사를 한국어로 옮긴 글입니다. 심심풀이로 하는 일이므로 오역과 의역이 다수 있음을 알려드리며, 그럴 일은 없겠지만… 다른 곳으로 퍼가지 마세요.)